설교전문
설교일 | 2025-09-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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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말씀 | 엡2:14-18 |
설교제목 |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 |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
엡2:14-18
2025년 9월 21일 [기독교교육진흥주일, 성령강림후 열다섯째주일]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는 새 교우 심방이나 이사 가족 심방할 때 전해드리는 교회의 목각 벽걸이 선물에 적혀있는 구절이다. 오래 전에 우연히 한번 선물용으로 샀다가 너무 깔끔하고 기억에 남는 구절이라, 다음에는 교회에서 수십 개씩 사서 가끔 선물로 사용하곤 했다.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는 그리스도가 평화가 되신다는 뜻도 되고, 그리스도가 우리 삶에 평화를 주신다는 뜻도 된다. 교우들이 이 선물을 받으면 ‘좋다’는 반응을 보여주신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기를 바라는 뜻이 담겨있는 반응이다.
모두가 평화를 원하지만, 평화는 좀처럼 우리에게 이뤄지지 않는다. 최근에는 이스라엘이 가자지구 전쟁을 끝내려는 나라들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공격을, 평화를 중재하고 있는 카타르 대표단에 퍼부었다고 보도되고 있다. 이 전쟁은 2년 전 하마스라는 테러단체가 이스라엘을 향한 전면폭격을 하고 251명의 이스라엘 민간인을 포로로 잡는 일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오랜 기원을 가지고 있는 중동 전쟁은 좀처럼 끝날 줄을 모르고 계속 격화하고 있다. 하마스를 궤멸시킬 목적으로 가자지구에서 불붙은 2년 된 팔레스틴 전쟁도 좀처럼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테러와의 전쟁은 인근 중동의 거의 모든 나라, 그리고 유럽과 아시아의 여러 나라가 연관되어 있다. 특히 이스라엘과 미국, 유럽의 일부국가들의 연합과 아랍 제국들의 연합으로 서로 힘을 북돋우어 주면서 격화되고 있는 전쟁은 수천명의 희생자를 내고도 끝낼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군사력이나 물리력의 강압으로는 어떤 방법으로도 해결방법이 없어 보이고, 정치적이고 외교적인 방법도 도무지 실마리를 찾을 수 없다.
한 일간신문은 사설에서 미국의 대테러전쟁은 성공하기 어렵다면서, 당사자인 이스라엘과 하마스뿐만이 아니라 국제 사회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서 이제 테러와의 전쟁 대신 다른 해법을 찾아야 한다고 하였다. 이제는 세계 나라들이 둘러앉아 팔레스틴 지역의 평화와 세계 평화를 위해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한 방안을 머리를 맞대고 찾아내야 한다. 가장 분명한 방법은 기독교와 이슬람 모든 세력, 모든 사람들과 평화를 이루기 위해 서로를 향한 적대와 공격을 그치고 평화를 위해 손을 내미는 일이다.
세상은 평화 원하지만 전쟁의 소문 더 늘어간다.
이 모든 인간고통 두려움뿐 그 지겨움 끝없네.
그러나 주 여기 계시니, 우리가 아들 믿을 때에 그의 손으로 하나 돼.
우리가 아들 믿을 때에 그의 손으로 하나 돼.
하날세, 우리 모두 다! 하날세, 우리 모두 다!(x2)
꼭 국제 사회의 분쟁이라는 거창한 문제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우리 인생에서 가장 힘들고 괴로운 문제가 평화롭지 못한 것이다. 경쟁 때문에 아이 때부터 너무 괴롭다. 공부, 재능, 인물 문제로 아이들이 고민하는데, 그 사실 자체가 힘든 것이 아니라, 그것 때문에 다른 친구들 사이에서 소외되고 무시당하는 것, 즉 평화가 깨지는 것이 정말 괴롭고 힘든 문제다. 갈등이 가까운 가족과 친구 사이에서 계속 일어나고, 한 번 갈등이 생기면 좀처럼 해결되지 않는다. 가정불화는 얼마나 가족들을 힘들게 하는가? 비행을 일으키고 주위에 걱정을 끼치는 문제 청소년 대부분은 가정에 평화가 없는 데에서 생겨난다고 한다.
더구나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믿음과 사랑의 공동체인 교회 안에서도 때로는 갈등과 오해와 분열로 심한 어려움을 당하고 큰 시험을 만나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이다. 적지 않은 교회가 마귀와 죄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성도끼리 싸우느라고 모든 힘을 다 빼고 있다. 교회 안에서의 갈등과 문제가 때로는 법정으로 비화하여 사회에까지 큰 물의를 빚고 심지어 언론에까지 등장하기도 한다. 교회가 불신자를 위해 기도해야 할 텐데, 오히려 불신자들이 싸우는 교회를 위해 걱정해주는 때도 있다. 우리에게는 화평을 이루시는 그리스도 주님이 계신데 웬일이란 말인가! 참으로 부끄럽고 송구스럽다. 평화를 이루자!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주님이 평화라고 선포하였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이 양쪽으로 갈라져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드신 분이십니다.’(14절, 새번역) 그렇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다. 그런데 왜 전 세계에 기독교인이 그렇게 많은데 주님의 평화를 이루지 못하는가? 왜 믿는 사람들조차 자기들끼리 진정한 평화를 이루지 못하나? 그것은 주님의 방법, 평화의 방법으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은 힘에는 힘, 말에는 말, 문제에는 문제로 대항하는 논리가 있다. 한 대를 맞으면 세 때를 때려라, 소총으로 맞으면 박격포로 때리고, 박격포로 맞으면 대포로 때려라 하는 논리이다. 목소리에는 더 큰 목소리로, 압박에는 더 큰 압박으로, 실력행사에는 더 큰 실력행사로 눌려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흔히 하는 말로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고 한다. 정말 그런가? 국제사회의 대테러전쟁에서 보듯이 힘에는 힘으로 하는 방법은 해결방법이 아니고 기분풀이 방법이다. 기분은 풀릴지 몰라도 갈등은 절대 풀리지 않는다. 평화를 이루려면 평화로 풀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시다! 그리스도의 방법으로 우리 안의 갈등을 풀고, 나아가 온 세계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화를 누리도록 기도하자!
먼저, 마음의 평화이다. 사람들의 마음이 평화롭지 못한 것은 그 마음을 더럽히고 복잡하게 하는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더럽고 복잡하게 만들어 평화를 깨뜨리는 게 무엇인가? 우리 마음에서 나와 우리 마음을 어지럽히고 더럽히는 것, 우리에게서 나와 우리를 대적하고 넘어뜨리는 것, 그것은 바로 죄이다. 죄는 내게 속한 것인데 나를 대적하고 나의 원수가 되어 나를 넘어지게 하고 파멸하게 한다. 마음의 평화가 없음으로 남과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마음의 평화가 깨짐으로 스스로 행복하지 못하다.
본문을 보면, 그리스도는 자기희생으로 평화를 이루셨다. ‘원수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14하)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16절) 원수는 바깥에만 있는 게 아니라 내 안에 있다. 이게 죄인데, 죄로 인한 마음의 혼란과 불안을 없애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믿으라! 주님이 마음에 평화를 이루신 방법은 십자가인데, 이것은 자기를 희생시키는 길이다. 예수께서 내게 오셔서 죄값을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낮아지고 초라해짐으로 죄값을 치루셨다. 우리 마음 속에서 싸우는 둘 사이에 평화를 주셨다. 이게 십자가다!
십자가로 우리 죄가 사함받았다. 그리스도가 우리 위해 죽으신 그 사랑으로 모든 형벌이 사해지고 모든 원수맺음이 갚아졌다. 그리스도를 내 마음에 오시도록 마음을 열자! 그리스도를 모시자! 그리스도를 주인 삼아야 한다. 그러면 마음의 평화를 얻을 것이다. ‘주여! 내게 오시어 내 마음의 주인 되어 주소서! 그리하여 혼란과 불안이 사라지고, 참 평화가 내 안에 이뤄지게 하소서! 주는 죄를 사하시고 막힌 담을 허셔서 내 안에 화평을 이루어 주소서!!’
다음은 관계의 평화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모든 것이 있다.’고까지 말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사랑이 있고 평화가 있으면 행복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미움이 있고 불화가 있으면 불행하다.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요즘 세상은 이기는 법을 가르친다. 남보다 잘하고 앞서가고 이기기 위해 아침부터 밤까지, 아이들이나 어른이나 무섭게 노력한다. 사실은 모두 이길 수 없고, 모두 일등 할 수 없으며, 모두 앞서갈 수는 없다. 그러니 평화가 깨진다. 나는 이겨야 하고, 나는 앞서 가야 하고, 내게 이익이 되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너는 내려가라, 물러서라 하니 서로 경쟁하고 싸우게 된다. 누군가는 지고, 누군가는 내려가고, 누군가는 물러설 수 있어야 평화가 이뤄지지 않겠는가? 주님은 지고 내려가고 죽는 십자가 위에서 평화를 이루셨다.
기독교는 순교의 역사다. 수제자였던 베드로는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다. 빌립은 소아시아에서 십자가를 지고 죽었다. 스데반은 예루살렘에서 돌에 맞아 죽었고, 바돌로매는 몸의 가죽을 벗기는 죽임을 당했다. 도마는 인도에서 순교했다. 마가는 알렉산드리아에서 기도하며 순교했다. 마태는 에티오피아에서 창에 찔려 순교했다. 안드레는 에데사에서 십자가에 못 박혔다. 맛디아는 예루살렘에서 돌팔매질을 맞고 쓰러진 뒤 목베임을 당했다. 누가는 헬라에서 감람나무에 매달려 죽임당했다. 바울은 로마에서 칼에 목이 떨어지면서도 예수의 이름을 부르다 죽었다. 사도 요한은 백살까지 온갖 시련을 다 겪다가 죽은 살아있는 순교자였다.(설교자노트 07-9·10, p.38)
주님과 수많은 사도들이 이 땅에서 지고 쫓겨나고 죽는 순교를 이룸으로써 평화를 이루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지는 법을 배워야 한다. 내려놓은 법을 알아야 한다. 남보다 낮아지기를 훈련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십자가로 둘을 하나가 되게 하며 진정한 평화를 선포하셨기 때문이다. 조금만 물러서고! 조금만 낮아져 보면 어떨까?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우리 안에 오셔서 모든 관계를 화목하게 하면, 천국이 가까워질 것이다. 조금만 내려놓으면 주님이 오셔서 평화가 훨씬 가까이 온다.
평화는 하나님과 함께 할 때 이뤄진다. 15절 가운데,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여기서 둘이란 유대인과 이방인 헬라인, 그리스인을 가리킨다. 남한과 북한, 여와 야, 이스라엘과 팔레스틴,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미국과 중국을 다 말할 수 있다. 이 둘은 항상 다르다, 항상 적처럼 마주 대한다, 항상 싸울 이유가 많다. 그러나 하나님과 함께 할 때,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이 되게 하신다!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저들을 용서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셨듯이 우리는 평화를 위한 모든 노력을 할 때 기도하면서 하나님과 함께 그 일들을 해야 한다. 가정이 불화하면 감정에 휘말려 일을 급하게 처리하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면서 하나님과 함께 무슨 일이든 결정하고 행하라. 그러면 평화가 서서히 찾아오는 것을 경험할 것이다. 사람 사이의 평화도 내 마음의 평화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므로 갈등과 불화로 괴로울 때면 평화를 위해 많은 기도를 드리고 하나님께로 나아가 하나님과 함께 해야 한다.
낙타는 하루를 시작하고 마칠 때마다 주인 앞에 무릎을 꿇는다. 즉, 하루를 보내고 일을 끝마칠 시간이 되면 낙타는 주인 앞에 무릎을 꿇고 등에 있는 짐이 내려지길 기다리며, 또 새날이 시작되면 또다시 주인 앞에 무릎을 꿇고 주인이 얹어주는 짐을 짊어진다. 주인은 낙타의 사정을 잘 안다. 그렇기 때문에 낙타가 짊어질 수 있을 만큼의 짐만 얹어준다. 낙타는 주인이 얹어주는 짐을 마다하지 않는다.(설교자노트 07-9·10, p.42)
일어설 때도 먼저 무릎 꿇고 일어서고 앉을 때도 먼저 무릎 꿇고 앉는 낙타처럼, 그렇게 무릎 꿇는 성도가 되라. 무엇보다 원수된 것, 어색한 것, 괴로운 것, 갈등과 싸움과 분쟁과 소외감과 섭섭함을 일으키는 모든 문제 앞에서 평화를 이루어 달라고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이 함께 해달라고, 겸손히 끈질기게 기도해야 한다. 오늘도 평화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했는가? 매일 확인하자!
지속적으로 대화할 때 평화는 또한 이뤄진다.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17절) 아무리 어색해도 대화를 끊지 말라! 대화를 통하여 자꾸 평안을 전하라. 대화하면 막힌 담을 헐어지고, 멀어졌던 관계가 한결 가까워지며, 미운 마음이 줄어든다. 성경은 먼 데 있는 사람에게 먼저 평안을 전했다고 한다. 멀어진 사람, 미워하는 사람, 서먹서먹해진 사람에게 먼저 평안을 전하자. 가까운 사람도 멀어지지 않도록 평안을 전하라. 곧 평화가 이뤄진다!
미국 소매상협회의 통계를 보면, 판매원의 48%가 한 번 전화하고 포기하고, 25%는 두 번 전화해보고 포기하며, 15%는 세 번 전화해보고 포기한다고 한다. 즉 88%의 세일즈맨이 1-3번의 전화만 하고 판매를 포기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머지 12%는 끈질기게 전화해서 결국 판매를 하는데, 놀라운 것은 이 12%가 전체 판매량의 80%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평화를 이루는 데에도 이런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한두 번 얘기해보고 화해가 되지 않는다고 포기하지 말고, 세 번 네 번 평화를 계속 전하고 대화를 시도하라. 독일의 통일도 브란트의 지속적인 대화정책이 바탕이 되어 이뤄진 것이다. 남북관계도 이제 거의 희망이 없어진 것 같지만 우리는 대화하기를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이 일하신다! 기도하는 이 동포를 사랑하신다! 대화가 강 같이 흐르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잠깐 기분 나쁘다고 기분 나쁜 내색하고 포기해버리지 말고, 계속 주님처럼 대화의 손길을 내밀면 틀림없이 평화가 이뤄질 것이다. 부모, 형제자매, 친구 친지, 교우, 동업자와 대화를 시작하라!
오늘은 기독교교육진흥주일이다. 2004년 바나 여론조사에 따르면 85%의 그리스도인들이 14세 이전에 예수님과 교제를 시작하였다고 한다. 자녀들을 믿음으로 교육하는 일에 가장 기본이 되고 중심이 되는 주제는 평화이다. 평화를 이루고 평화를 전하는 일이야말로 다음 세대에까지 이어갈 가장 좋은 자산이다. 전쟁과 갈등의 세계를 물려주지 말고 평화와 복지의 사회를 물려주어야 한다.
내 마음이 평화로운가? 아침에 깰 때에, 밤에 잠들 때에 우리 마음에 평화가 깃들어 있는가? 올해 <예수 안에 행복>을 표어로 내걸었는데, 주님 모시고 행복하라!! 행복이 더해가는 우리 가정 세우자! 우리 인간관계를 돌아보아 평화를 이루어 가자! 가정 문제, 사회 문제, 국가 문제, 알고 보면 평화가 해결책이다.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 평화를 이루기 위해 평화의 방법으로 하자! 주님 모시고 마음의 평화 회복하자! 관계의 평화를 가져와야 한다. 주님께 기도하면서, 지속적인 만남과 대화를 통하여 평화가 온전히 이루어 질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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