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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여호와께 돌아가자!" (호6:1-6) [2020년 5월 17일, 부활절여섯째주일]
2020-05-16 12:08:00
박신진 목사
조회수   3140
설교일 2020-05-17
설교말씀 호세아6:1-6
설교제목 "우리가 여호와께 돌아가자!"

우리가 여호와께 돌아가자!”

6:1-6

2020517[부활절 여섯째주일]

 

나로부터가 아닌 하나님께로부터

지난 주간은 이태원에서 시작된 또 다른 코로나전염이 모두를 염려스럽게 했던 주간이었다. 아직 코로나19의 여파가 온 세상을 위협하는 때이지만, 이제 교회는 모든 예배를 회복하고 방역을 조심하는 가운데 모임과 활동을 정상화하였다. 이제 새해를 시작하듯이, 아니면 우리 교회생활을 처음부터 새로 하는 마음으로 다시 시작한다. 하나님의 새롭게 하시는 은혜와 거룩한 능력이 여러분 위에 임하기를 축복한다. 우리는 새 믿음으로 시작하기 원한다!

종교라는 단어, 라틴말로 ‘religio’를 처음 쓴 사람은 로마 철학자 키케로이다. ‘religere’라는 말에서 왔는데, ‘바라다는 뜻이다. 그래서 종교는 인간이 신적 대상에게 바라는 것을 이루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 신께 바라는 바를 이루는 것은 종교를 가지는 데 있어서 원시인들과 고대인들이 당연하게 여긴 것이었다. 헬라의 다신교 체제 아래에서는 인간들의 욕망과 바람을 이루어주는 존재들로 초월적 신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이런 종교관은 요즘도 사람들이 주로 갖는 생각이다. 포이에르바하는 종교란 인간이 희구하는 것을 신적 대상에게 구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즉 심리적인 안정과 부귀영화와 명예와 무병장수를 이루려고 비는 것이 종교라는 것이다.

종교가 바라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할 때, 기독교는 종교인가? 본회퍼는 기독교의 비종교화를 말했다. 무언가 자기가 바라는 것을 이루려는 것이 종교라고 할 때 기독교는 그런 것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본회퍼는 기독교가 종교를 넘어설 때만이 진정한 기독교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기독교는 인간이 바라는 것을 하나님께 비는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에게 바라시는 바를 실천하려는 가르침이다. 그러면 기독교에는 인간이 바라는 바는 없다는 것인가? 아니다, 있다. 문제는 우선순위이다. 먼저 하나님이 바라는 바를 이루고, 그리고나서 사람들이 바라는 것도 함께 이루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6:33) ‘이 모든 것은 사람들이 희구하는 것이다.

칼뱅이 예리하게 말했듯이 인간의 마음이야말로 우상들을 만들어 내는 공장이다.”(기독교강요) 사람이 마음으로 욕망하는 것들이 결국 우상숭배에 빠지게 한다는 것. 기독교는 자아를 추구하는 삶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뜻을 가르친다. 인간은 진리와 성령으로 거듭나서 새로운 존재가 되어야만, 미신과 우상숭배에서 벗어나 참된 삶을 누리게 된다. 예를 들어, 바알숭배는 전형적인 종교, 풍요와 쾌락을 추구했으니까. 선지자들은 그 길이 우상숭배의 길이요, 하나님을 배반하는 길이라고 외쳤다. 세 달의 코로나 격리기간을 지나면서 새롭게 신앙생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본래의 길, 참 길에서 출발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로 돌아가 거기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나에게서 시작하지 말고 하나님에게서 시작하라!

 

여호와께 돌아가자!”

호세아 선지자는 북이스라엘의 멸망기에 활동했다. 임금 여섯이 통치했는데 그중에 넷이 암살당하는 정치불안기였다. 결국 앗시리아에게 나라가 망하자 호세아는 유다로 와서 더 이상 예언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나라가 망해가는 극심한 혼란기에 씌어진 호세아의 전체 주제가 오늘 말씀에 나와 있다. 여호와께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하나님께로부터 시작해야 하겠다는 말씀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항상 자기가 앞선다. 자아의 지배를 받는다. 그래서 회개가 어렵다. 자아를 뒤집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기 편한 습성을 가지고 있다. 사진 찍을 때 항상 뒤편에 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운데 앉아야 하는 사람이 있다. 습성이다. 글을 쓸 때 문장 끝을 습니다.’로 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직도 읍니다.’로 쓰는 사람이 있다. 89년에 문법이 바뀌었는데도 습관이 바뀌지 않는다. 영적인 습관도 잘 바뀌지 않는다. 가까이 다가오지 않고 멀리 있으면서 항상 불평하는 습관, 혼자 앞장서서 일하다가 지쳐 떨어지는 습관, 묵묵히 자기 자리 지키며 참여하는 습성이 있다. 기도하는 습관, 전도하는 습관도 각각이다. 이런 영적 습성은 바꾸기 어렵다. 좋지 않은 습관인지 알면 바꾸어야 하는데, 하던 대로 하기가 쉽지 바꾸기가 어렵다. 이것이 회개가 어려운 이유이다. 편한 것, 익숙한 것을 거슬러 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하는 교우들께 요즘처럼 혼란기에 다시 시작한다면, 잘못된 습성을 한두가지 바꾸는 데에서 시작하라고 권면하겠다. 우리는 호세아 6장의 1-6절을 읽었다. 여기 3절까지는 여호와께 돌아가자는 영적 운동에 대하여 말하는 유명한 구절이다. 4-6절은 말씀대로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못하고 미적대는 이스라엘의 실패에 대해서 말한다. 먼저 4-6절에서 왜 그들이 실패하고 있는가, 왜 회개하지 못하는지, 왜 여호와께로 돌아가지지 않는지를 생각해보자. 그리고나서 1-3절로 돌아가 어떻게 여호와께로 돌아가는지 말씀을 살펴보자.

 

여호와께로 돌아가기가 안 되는 이유

여호와께로 돌아가야 하는데 안 되는 원인이 4-6절에 나온다. 다 하나님께로 돌아가 그분의 말씀과 뜻대로 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게 잘 안 된다. 호세아 선지자 시대의 이스라엘 왕들과 백성들도 그랬다. 하나님 뜻대로 나라를 다스리고 삶을 영위해야 하는 걸 알지만 안 되었다. ? 인애가 부족해서이다.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4) 사랑이 말라서 하나님께로 돌아가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애, 사랑이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처럼 메말라 있으니 무슨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겠는가! 옳은 줄 알면서도, 해야하는 줄 알면서도 사랑이 말라 힘이 없으니 하지 않게 되더라는 것이다.

사랑은 자발적이다. 하지 말라 해도 하는 게 사랑이다. 할아버지 한 분이 할머니를 여의고 혼자 살다가 뒤늦게 좋아하는 여자를 만났다. 그분을 사랑하고 뭐든지 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그 여자분이 자기는 담배냄새가 싫다고 했다. 그냥 자기는 담배 피우는 냄새가 싫다고 했을 뿐인데 이 할아버지는 40년 피우던 담배를 끊었다! 그동안 담배 끊으라는 소리를 얼마나 들었는지 모른다! 누가 끊으라고, 건강에 좋지 않다고 아무리 말해도 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이 담배가 싫다 하니까 스스로 끊게 되더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새록새록 살아나면 진정한 회개가 이뤄진다, 할 수 없는 일을 하게 된다.

사랑은 독점적이다. 나만 사랑하라는 것이다. 공유가 안 되는 게 사랑이다. 어린아이들이 그렇게 천진하게 귀엽게 행동다가도 엄마의 사랑을 향해서는 양보가 없다. 둘 다 엄마 치마꼬리를 붙들고 울어대면 대책이 없다. 엄마는 나만 사랑해달라는 것이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독점적인 사랑을 요구하신다. ‘나는 너를 원한다.’는 것이다. 여기 에브라임아!”라는 표현은 이스라엘을 좋지 않게 부르실 때 쓰는 표현이다. 그들의 사랑이 말랐음을 하나님이 아쉬워하신다. 이유만 있으면 핑계를 대면서, 하나님을 벗어나 딴짓을 하는 그들이 섭섭하시다! 풍성하고 뜨거운 사랑이 없어지고, 메마르고 형식적인 사랑만 남아있다. 우리가 주일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은 우리가 사랑으로 주 앞에 나오는지, 형식적으로 주님을 바라보는지 알고 계신다. 사랑이 메말라서 여호와께로 돌아가지 못하니, 사랑을 회복하라, 하나님의 사랑에 눈을 뜨라!

 

또 왜 여호와께로 돌아가지 못하는가? 마음이 없어서 그렇다. 우리 인간에게는 육체가 있고 마음이 있다. 하나님은 마음이 육체를 다스리기 원하신다. 마음이 이끄는 대로 살아야 한다. 육체가 마음을 이끌어가게 되면 본능이 이끄는 짐승같은 생활을 하게 된다. 마음이 중요하다. 6절을 보면,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 아는 것을 원한다.’라고 하셨다. 제사와 번제는 밖으로 드러나는 하나님 사랑의 행위이다. 물론 우리의 신앙생활에는 그런 행위와 표현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나는 제사와 번제의 행위만 있으면 뭘 하나? 인애와 하나님 아는 것을 더 원하신다는 것이다. 즉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요구하신다. 여호와께 돌아올 때 몸만 오지 말고 진정을 기울이는 마음이 와있기를 바라신다.

마음 없이 행동만 하는 것처럼 난감한 게 어디 있나? 형식적인 사랑, 요식절차만 남은 관계가 그러하다. 생일에 꽃을 주는데 마음이 하나도 없는 선물이다, 그나마 안 주는 것보다는 낫다고 할지 모르지만, 마음 없는 꽃선물은 쓸쓸하기까지 하다. 명절에 부모공경한다고 자식들이 찾아오지만 부모는 진심으로 부모사랑하고 고마워하는 마음을 원하는 법이다. 하나님도 그러시다. 마음이 있는 예배, 마음을 다하여 눈물로 드리는 헌신을 바라시는데, 우리는 마음을 잃어버려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지 못한다. 마음이 없어서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못한다. 돌아가는 시늉을 하면서도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지 못하여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

마음이 맞을 때, 부부는 재물이 없고 큰집에 살지 않아도 행복하다. 자식들이 내 마음을 알아주면, 얼마나 행복하고 보람이 있는지 모른다. 하나님을 알고 내가 하나님께 마음을 드릴 때 우리는 여호와께로 돌아갈 수 있다. 여호와께 돌아가는 길은 무엇보다 마음이 돌아가야 한다. 마음이 없어서 못 하는 거다, 마음이 있으면 어려운 일도 할 수 있다. 마음을 돌이키라, 마음을 회복해야 한다. 이스라엘은 사랑이 메말랐고, 마음이 떠나있었기에 여호와께 돌아가기 어려웠다.

 

어떻게 여호와께 돌아갈 수 있나?

1-3절은 여호와께 돌아가는 길을 말하고 있다. 우리의 습성, 우리가 해오던 것 때문에 회개가 잘 안 되는데, 회개의 방법이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먼저 우리가돌아가자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하실 때 우리속에는 가 포함되어 있다. 여호와께 어떻게 돌아갈 것인가? 어떻게 회개가 이뤄질까? 주로 교회가 바로 서야 돼, 나라가 바로 되어야 한다니까 하면서 자기를 빼놓는 사람들이 있다. 어떻게 여호와께 돌아갈 것인가? 나부터 돌아가야 한다. 내가 돌아가야 한다. 교회가 돌아가려면, 나라가 하나님께 돌아가려면, 바로 가 하나님께 돌아가야 한다.

요나서 공부할 때, 요나 선지자의 이름 뜻이 무엇인가 배운다. ‘비둘기. 그런데 진짜 그 성경에 근거한 뜻은 ’!”라고들 한다. 요나는 니느웨 사람의 회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의 회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부터 돌아가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다. 그걸 보면서 이렇게 철저하게 배신할 수 있나,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주를 버리지 않겠다고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다짐했던 사람이 바로 그 저녁이 지나기 전에 맹세하며 나는 모른다.’고 부인하다니! 그러나 비난하지 말라,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 새벽기도 때 기도하고 집에 가서 부부싸움하는 사람이 내가 아닌가! 내가 회개해야 모두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다./ 출애굽기를 요즘 새벽에 읽는데, 애굽 그리워하며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는 그들의 몰염치함과 배반을 생각하면 하나님이 아니라도 우리가 다 화가 난다. 그러나 그들을 원망 마시라, 그게 바로 지금 내 모습이다.

모든 하나님의 말씀은 이스라엘을 향한 말씀도, 유다를 향한 말씀도, 초대교회나 이방교회를 향한 말씀도 아니다. 바로 를 향한 말씀, 내게 주시는 말씀이다. ‘너부터 회개해야 한다?’ 아니다! 나부터 회개해야 한다!! 자식들 속썩인다고, 믿음 없다고, ‘내 속으로 난 자식이라도 이해할 수 없다.’고 탄식한다. 은근히 우리보다 믿음 없는 자식들 탓이다. 그러나 솔직히 생각해보라. 내가 주께로 돌아가지 못한 연고이다. 나 때문이지 누굴 탓하겠는가! 나부터 돌아가야 한다. 남편 문제, 아내와의 불편함, 자녀 문제, 모든 영적 문제와 교회생활의 시험거리, 나라와 민족 문제의 해결을 어디에서 찾는가? 혹 누구에게 문제가 있었더라도, 우리가 돌아가자! 나부터 돌아가는 길만이 참된 문제해결의 길이다.

 

어떻게 여호와께 돌아갈 수 있나? 나부터 회개하는 것, 여호와께 돌아가기를 실행하는 것에서 나아가, 두 번째는 하나님을 알고 믿는 것이다. 3절을 보자,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비와 같이 하나님이 임하실 터인데, 그러려면 여호와를 힘써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임하시는 것은 힘써 하나님을 알 때 이뤄지는 것이다.

알다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yada’를 쓴다. 이 말은 단순히 안다 모른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전반적인 관계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자고 할 때, 하나님에 대해서 알기를 힘쓴다는 말도 되지만, 하나님을 체험해서 알고 가깝고 친밀해진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힘써 안다는 것은 힘써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한다. ‘알다라는 말은 구약성서에서는 남녀가 육체적으로 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알면 파상적으로 막연하게 아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깊이 친밀하게 아는 것을 말한다.

중년이 넘어서면 아내가 남편을 속까지 다 알게 된다고 한다. 남편을 보고 싱긋 웃으면 무섭다고 한다. 남편이 마음 잡고 설거지 할게!’ 하는데 걸음걸이가 미적미적하면 중간에 아내가 다가와 내가 할게!” 한단다. 벌써 걸음걸이로 그 마음 상태를 다 알아차리는 것이다. 아기들은 엄마에게 얼마나 민감한지, 조금만 엄마가 화나서 내치면 알아차리고 울며 다가오지 않는가! 여러분은 하나님을 아는가? 하나님께 돌아가면 살게 해주신다. 싸매어주시고 고쳐주신다.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깨달음이 있을 때 우리는 염려하지 않게 된다. 하나님 상급에 대한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 돌아가지 않을 수 없다. 거기에 가장 복되고 아름다운 것이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훈련, 하나님의 연단, 이 모든 것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 때 우리는 평안하고 담대하며 능력있게 행할 것이다. 하나님의 돌보심과 사랑을 체험해 아는 것이다! 하나님을 친밀하게 알면 하나님 앞에서 항상 행하게 된다.

세계최고 수준의 하바드대학을 설립한 하바드 장군이 미 서해안 지역을 방문했다. 친구들은 그를 열렬히 환영하고자 깜짝 파티를 준비했다. 주지사와 상원의원들을 초청하고 유명한 연예계의 배우들도 초대하여 많은 친구들이 모이기로 했다. 그리고 그 날과 장소를 하버드 장군에게 알렸다. 마침 그날이 수요일 저녁이었는데, 이 이야기를 들은 하버드 장군은 깜짝 놀라며 그날은 약속이 있으니 다음날 목요일로 하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 친구들은 난감했다. 이미 수요일 저녁으로 섭외를 하고 약속을 잡는 중인데 모든 것을 변경하는 게 너무 어려웠다.

친구들은 그날 대통령도 축전을 보내주시겠다 했으니 하버드 장군의 수요일 약속을 미루면 어떻겠냐고 제안한다. 그러자 하버드는 나는 주일과 수요일 저녁 기도모임에는 반드시 참석해서 하나님과 교제하기로 약속했어요. 그러니 그 약속을 변경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해주십시오. 미안하지만 다음날로 연기해주세요.” 하고 요청했다고 한다. 결국 목요일로 파티는 연기되었다. 믿음의 사람 하버드는 자기 전 재산을 기부하여 하버드 대학을 설립하였고 그 대학은 세계 최고의 대학이 되었다.

하나님을 진실된 마음으로 예배하며 그분 알기에 힘쓰는 믿음의 사람 하버드를 하나님은 생명책에 기록해주셨으며, 역사에 남는 위대한 생애가 되게 하신다. 이런 좋은 사람들의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이루시고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도록 하신다! 그러니 여러분! 하나님을 알도록 힘쓰며 하나님께로 돌아가자!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가자! 사랑이 부족해서, 마음이 없어서, 우리가 걸어오던 죄의 길을 떠나지 못하는 이들이여, 이제 여호와께로 돌아오기 바란다! 내가 회개하고 돌아오면 된다, 하나님을 친밀하게 알도록 힘쓰자! 이제 여호와께로 돌아와 우리를 살리시며 일으키실 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영원토록 살게 될 것이다. 할렐루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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