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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이웃사랑 (누가10:25-37) [2025년 7월 13일, 성령강림후 다섯째주일]
2025-07-12 11:31:41
박신진 목사
조회수   7
설교일 2025-07-13
설교말씀 누가10:25-37
설교제목 그리스도인의 이웃사랑

그리스도인의 이웃사랑

누가10:25-37

2025713[성령강림후 다섯째주일]

 

<원더>, ‘기적이라는, 2017년에 개봉되고 올해 재개봉된 영화가 있다. 어기 풀먼은 심한 안면기형장애로 태어난다. 출생 장면에서 어기의 얼굴은 초반 연출을 위해 공개되지 않고 산모와 의료진, 아빠의 반응만 보여진다. 갓태어난 아기가 심한 안면기형이니 가족들이 엄청나게 놀라고 충격을 받는다. 그러나 어기는 온 가족의 관심과 사랑을 받으며 홈스쿨링으로 주로 집에서만 생활했다. 5학년 나이가 되자 어기의 엄마는 이제 어기가 학교를 다녀야 할 때라고 생각해 학교에 보낸다.

학교에 입학한 어기는 얼굴 때문에 놀림받아 친구를 사귀지 못한다. 특히 줄리안이라는 아이는 어기를 괴물이라며 계속 비웃는다. 그렇게 매일 혼자 앉아 점심을 먹는 어느 날, 과학 수업 시간에 문제를 어려워하는 잭 윌에게 답을 알려주고 함께 점심을 먹은 계기로 서로 친구가 된다. 잭은 다른 친구들의 놀림에서 어기를 지켜주는 도우미 역할을 해준다.

이렇게 어기의 힘든 학교 생활을 잘 보낼 수 있게 해준 잭은 할로윈 날, 어기가 있는지 모르고 어기를 놀리는 줄리안 무리들과 얘기하다 분위기에 휩쓸려 어기와 친하게 지내는 건 교장의 부탁일 뿐이며 내가 어기처럼 생겼으면 자살할 거라고 말한다. 유일한 친구인줄 알았던 잭에게 큰 상처를 입은 어기는 계속 잭을 무시하고 다시 외톨이가 되어버린다. 하지만 그때 유일하게 어기에게 다가와준 같은 반 여자 아이 썸머와 조금씩 친해진다.

후에 어기는 졸업식에서 모범학생이 되고,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준다. 누구보다 위트 있고 호기심 많은 매력 부자 어기'(제이콥 트렘블레이)지만, 남들과 다른 외모로 태어난 어기'는 모두가 좋아하는 크리스마스 대신 얼굴을 감출 수 있는 할로윈을 더 좋아했다. 자라가는 아들에게 더 큰 세상을 보여주고 싶었던 엄마 이사벨’(줄리아 로버츠)과 아빠 네이트’(오웬 윌슨)어기'를 학교에 보낼 준비를 했고, 동생에게 모든 것을 양보해왔지만 누구보다 그를 사랑하는 누나 비아'어기'의 첫걸음을 응원해주었다. 그렇게 가족이 세상의 전부였던 어기'는 처음으로 헬멧을 벗고 낯선 세상에 용감하게 첫발을 내딛지만 첫날부터 남다른 외모'로 화제의 주인공이 되고, 사람들의 시선에 큰 상처를 받는다. 그러나 어기'27번의 성형(?)수술을 견뎌낸 긍정적인 성격으로 다시 한번 용기를 내고, 주변 사람들도 하나둘 변하기 시작하였다.

이 영화는 사람을 보는 시선에 대한 이야기다. 편견을 가지고 어떤 틀에 집어넣어 사람을 보게 되면 남이 되고 멀어져 결국 원수가 되고 만다. 있는 그대로의 살아있는 사람을 받아들이고 함께 하면 서로 용납하고 이해하고 평화롭고 재미있는 관계가 된다. 그러다보면 우리의 삶이 살만한 인생인 것을 깨닫게 된다.

메마른 개인주의 사회이다. 예전 같으면 여름 더위에 동네 이웃들이 천렵을 간다던가, 여름 고깃국을 끓여 나누기도 하였는데, 이제 웬만하면 음식점에 가서 대접하고 집에서도 배달시켜서 먹는 시대가 되었다. 어떻게 하면 세태는 달라져도 사람 사랑 이웃 사랑이 더 따뜻하게 살아나도록 할 수 있을까, 아마 이런 생각은 누구나 한 번쯤 해볼 것이다. 아무 때나 어울려 같이 얘기도 하고 웃기도 하며 함께 음식을 나누는 인정, 네 집 내 집 가리지 않고 문을 열어 제쳐놓고 함께 어울려 살던 마을공동체 생활을 우리는 그리워한다. 그러지 못하는 사회를 그려주면서 <원더>는 이웃을 보는 눈을 고쳐야 한다고 알려준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도 사람을 보는 시선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강도만난 한 사람을 위험하다’ ‘죽어간다는 시선으로만 바라보고 사람들은 그를 멀리하고 피해간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너무나도 많이 알려져 있으면서도 충분히 모르고 지나가는 경우가 많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목에서 강도만난 사람이 발가벗긴 채 피 흘리며 죽어가고 있었다. 제사장이 보고 그냥 지나갔고 레위인이 피하여 그냥 지나갔다. 그러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길을 가다가 그 사람이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 도와주었다.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주라.’ 35,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니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하신다.

그런데, 조금 더 자세히 보면 이 비유는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담고 있다. 우선 이 비유 이야기는 율법 선생과 대화하시다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다. 무슨 대화였는가? 영생에 관한 주제였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25) 영생, 즉 믿음의 본질과 인생의 진리에 관하여 말씀하시다가 이 비유가 나왔으므로 이것은 중요한 신앙 진리, 성경의 핵심 주제를 다루는 것이다.

영생을 얻는 길을 물어보는 율법 선생은 진리를 알고 행하려고 물어본 게 아니라 예수를 시험하려고 물어본 것이었다. 예수님이 얼마나 성경을 잘 아시나, 얼마나 성경대로 사는 사람인가, 이걸 시험해보고 실력이 없고 가르친대로 살지 않으면 예수가 형편없던데’, 그렇게 소문내려고 물어본 것이다. 그러자 예수님은 오히려 그에게 지식을 발휘할 기회를 주셨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율법 교사는 27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그러자 예수님은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셨다.

율법교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님께 이렇게 물어보았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그러자 예수님이 영생을 어떻게 얻느냐에 대한 율법교사의 대답과, 이웃이 누구냐는 추가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하신 말씀이 바로 이 비유이다. 여기 비유의 시작과 끝에 중요한 변화가 있다. 한 가지는, 영생에 대하여, 또 이웃에 대하여 벌였던 추상적인 토론이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는 실천적인 명령으로 바뀌어 있다. 두 번째는, “내 이웃이 누구냐?” 라는 질문이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냐?”로 바뀌어 있다. 이웃에 대한 관점이 바뀌었다, 보는 눈이 달라졌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이 영생을 얻으려면,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데, 그 이웃 사랑에 대하여 주님이 주신 가르침이다.

 

먼저 이 강도만난 자에 대한 비유 이야기는 뭐든지 자기중심으로 보면 이웃 사랑이 어렵고, 그 이웃 중심으로 보아야 이웃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요즘 사람들 정말 이기적이다. 남 앞에서만 아니라 부모자식간이나 부부 사이에도 그렇다. 사람은 본래 이기적이다. 오늘의 이야기에서 제사장과 레위인은 특별히 못된 사람들이 아니다. 이기적인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한 예에 불과하다. 이기적이라는 말은 자기 관점에서만 바라본다는 말이다. 제사장과 레위인에 우리 자신을 다 대입해보면 우리도 똑같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기적인 인간이 남을 조금만 배려하면, 남을 보는 눈을 조금만 뜨면 사랑을 이룰 수 있다고 가르쳐주신다.

제사장은 제사를 집전하는 사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정을 타면 안 된다. 만약 지금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에 강도를 만나 옷을 빼앗겨 발가벗기고 매를 맞아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사람을 도와주려고 그를 만진다면, 이미 발가벗은 사람을 만졌기 때문에 부정을 탄 것이고, 게다가 피를 만지지 않을 수 없을 테니 피를 만진 부정을 탈 것이며, 그 위에 강도 만난 사람이 거의 죽게 되었기 때문에 어떻게 하다가 죽기라도 하면 시체를 만진 게 되므로, 그런 일이 생긴다면 제사장에서 은퇴해야 할지 모른다. 제사장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제사장은 자기 입장을 생각해고, 그냥 지나갔다.

레위인은 어떤가? 레위인은 성전을 위해 구별된 지파이고 성전에서 특별한 몫으로 주는 땅에서 먹고 사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제사장보다 더 자유가 없었다. 어쩌면 레위인은 바쁜 일로 급히 가야 했는지도 모르고, 또 언제 강도가 나올지 알 수 없었다. 피의 부정, 사체를 만진 사람이 일주일을 구별되어 있어야 하는 것 등, 아마 레위인도 정결법과 관련한 종교적인 문제가 이만저만 복잡한 것이 아니었다. 자칫 생겨날 오해를 피하기 위해 지나간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제사장과 레위인의 행동은 이기적이고 자기만 생각하는 것이었다. 분명 그들도 도울 마음은 있었고 어떻게 할까 고민했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 입장만 생각하니 가서 돕는 것은 너무 무모한 일로 여겨졌다. 그들은 지나갈 수밖에 없다고, 저 사람보다 내가 더 급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강도 만난 자를 보는 눈이 떠졌다면, 그 주간의 제사에서 빠지는 게 그렇게 심각했을까? 제사장에게 야단맞고 순번에서 빠지는 한이 있더라도 레위인이 강도 만나 죽어가는 형제를 조금만 봤더라면 그렇게 지나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다른 사람 입장에서 바라보고 생각하는 것은 불편하고 위험한 일에 불과했다.

흑백 인종차별을 극복하기 위해 자신을 바친 마틴 루터 킹 목사는 흑백 인종차별을 극복하기 위해 신앙인들이 일어날 것을 말하면서 그런 행동을 위험한 이타주의라고 표현했다.(설교자노트 04-7,8월호, p.46) 언제나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안전하고 편안하기 마련이다. 보통 이기적인 사람이 손해 안 보고 자기를 지킨다. 이타적으로 생각하고 남을 돕겠다고 행동하다보면 손해를 보고 위험하고 어려운 일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 사마리아인은 위험한 이타주의를 실천하였다. 사마리아인이 강도만난 자 곁에 와서 보니 피를 흘리고 거의 죽어가고 있었다. 아직 강도가 근처에 있을지도 모르고, 유대인들은 원래 사마리아인을 미워하기 때문에 이 사람 도와주면 복잡한 일이 생길지도 몰랐다. 죽어가는 이 사람을 외딴 길에서 수습하여 가다가는 어떤 어려운 문제가 생길지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이 그런 위험하고 번잡스런 일을 감히 한 것은, 죽어가는 강도만난 사람을 보았기 때문이다. 사마리아인도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순간 했을 것이다. ‘나도 바쁘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괜히 나까지 다칠지 모른다.’ 그러나 위험한 이타주의!’ 이타적인 생각, 강도 만난 자를 중심으로 보았을 때 그는 망설일 수 없었다. ‘이 사람은 죽어가고 있다. 누군가가 그를 도와주어야 산다. 지금 그냥 지나가면 그는 죽는다.’ 사마리아인은 바로 자기가 그를 도와서 살려줄 그 누군가가 되기로 결정했다. 예수님은 영생의 길과 이웃 사랑에 대하여 얘기하시면서, 그 사마리아 사람처럼 행하라고 하셨다. 그러니 우리가 다 이기적이지만, 자기만 생각하는 데에서 벗어나 어려움에 빠져있는 이웃을 생각하는 데에로, 자기만 보지 말고 남도 바라보면서 살라고 하신다!

 

, 우리 믿음, 이웃사랑은 항상 막연히 아는 데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한다. 아는 데 있어서는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훨씬 낫다. 율법을 더 읽고 교리도 더 안다. 그런데 그들은 아는 대로 살지 않았다. 사마리아인은 과거 북왕국이 앗수르에 멸망했을 때 잡혀가서 전통도 잃어버리고 율법도 잃어버리고, 말하자면 막 되먹은 종족이 되어 버렸다. 뭐 제대로 알기를 했겠나? 유대인들이 보기에 사마리아 사람은 율법을 알아도 어설프게 알았다. 그런데 조금밖에 모르지만 아는 대로 행했다. 예수님은 조금 알아도 아는 대로 산 사람 있지? 그 사람처럼 행해야 해!!’ 이렇게 명령하셨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이거 모를 사람 어디 있나? 몰라서 안 되는 게 아니다. 행하지 않아서, 제대로 알지 못한다. 진리를 알려고 노력하라! 그러나 더욱 한 가지라도 아는 것을 더 행하기를 힘쓰라!! 사마리아인은 1)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이웃을 향한 배려와 사랑이다. 그다음에 사마리아인은 2) 가까이 갔다. 무조건 이웃사랑은 멀리하지 말고 가까이해야 한다. 3) 상처에 올리브기름과 포도주를 부었다. 여행 중인 사람에게는 귀한 것이었지만, 강도 만나 죽어가는 사람에게는 훨씬 급히 필요하므로 상처부어서 소독하고 응급치료를 했다. 4) 그리고 싸맸다. 천이 귀한 시대에 아마 옷을 찢었을 것이다. 5) 기 짐승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6) 두 데나리온- 이것은 적은 돈이 아니다-을 여관주인에게 주었다. 그리고 7)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갚겠다고 하였다.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모든 실천을 다 하였. 도망간 제사장 레위인들은 말만 앞세우는 그리스도인이다. 우리는 강도 만난 이웃들에게 무엇을 주었는가? 만약 우리 곁에 욥과 같이 갑자기 재산을 다 잃고 가족들까지 죽은 형제가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까? 욥의 잘난 친구들처럼 판단하고 가르치려고만 할까? 따뜻한 말 한마디, 손잡아주기, 포옹, 도움이 되는 작은 음식, 협력. 행동이 따르고 자기 지갑에서 돈을 꺼낼 줄 아는 사람이 진정한 이웃이다.

 

다음, 구원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결합하였을 때 나타난다. 기도도 잘하고 교회 생활도 충성하는데 이상하게 교만하고 인색하고 인간관계가 좋지 않고 사람들에게 욕을 먹는다. 이것은 영생 얻는 신앙이 아니다. 너무 사람 좋다는 얘기를 많이 듣고 봉사도 많이 하고 친구들도 많은데, 기도를 잘하지 못하고 예배를 제대로 드리지 않으며 주일 성수나 헌금드리는 것도 잘 못한다. 이것도 온전한 믿음이 아니다. 이 두 가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다 갖추어야 한다.

관념적인 사랑이 아니라, 실제적인 사랑이다. 실제 사람의 현실과 상황에 대해 어떻게 이웃으로 행동할 것이냐를 물으신다. H. 그리븐은 말하기를, “아무도 이웃이 누구인지 정의할 수 없다. 다만 이웃이 수 있을 뿐이다하였다. 성서에서 이웃('oplesion, 호플레시온)이란 가까이 있는 사람이다. 히브리어로 이웃은 레아(re'a)’인데 무슨 일에 상관이 있는 사람이다. 내 마음에 드는 사람, 나하고 비슷한 사람, 내 편이 이웃이 아니다. 우리 가까이 무슨 상관이 있어 만나거나 상대하는 사람들은 다 이웃이다. 피하고 싶은 사람, 항상 내게 손해를 입히는 사람도, 사랑해야 할 이웃이다. ‘도대체 이웃이란 무엇이며, 내게 누구입니까?’ 율법사는 이론적으로 물었지만, 예수님은 누가 네가 마주친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냐?’, 실제적으로 되물으셨다.

 

<원더> 영화이야기의 주인공 어기는 사랑이 필요한 이웃이었는데, 그를 이웃으로 받아들이고 함께 한 친구들과 가족과 함께 어려움을 이겨내고 멋진 인생을 살아가지 않는가! ‘어기는 내 친구입니까?’가 아니라, ‘누가 어기의 친구입니까?’ 하는 것이다. 자기만 생각하지 않고 제발 남을 좀 배려하라!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한, 그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생각하자! ‘누가 내 이웃입니까?’ 이기적으로 묻지 말고,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일까요?’ 물어보아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이웃 사랑을 실천하자! 이웃 사랑 없는 하나님 사랑, 혹은 하나님 사랑 없는 이웃 사랑에 그치는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함께 가는 성숙한 신앙이 되도록 우리 모두 결단하자! 요한 사도의 말씀대로,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3: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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