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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을 통과하여 믿음으로! (마가9:16-24) [2025년 8월 3일, 성령강림후 여덟째주일]
2025-08-02 11:07:35
박신진 목사
조회수   10
설교일 2025-08-03
설교말씀 마가9:16-24
설교제목 의심을 통과하여 믿음으로!

의심을 통과하여 믿음으로!

마가9:16-24

202583[성령강림후 여덟째주일]

 

흔들리는 시대, 보수적인 교회

요즘 세계 정세와 관련해서 사람들은 불안해하고 있다. 지난 주간에 미국은 우리나라를 향해 유럽이나 일본처럼 15%의 관세를 매기고, 3500억불이라는 투자를 유치하도록 압력을 넣어 결정했다. 아마 한국 경제는 만만치 않은 세계 경제의 도전 앞에서 바닥으로 굴러떨어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쳐야 할 것이다. 직장인들, 중소상인들도 올해 우리 경제, 우리 살림이 어떻게 될지 불안한 마음을 추스르지 못하고 있다. 가게문을 닫거나 직장을 그만 두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가정조차도 확실하지 않다. 건강하던 남편이나 아내가 갑자기 건강을 잃든지 경제적인 사고를 당해 온 가정이 위기에 빠지는 때도 있다. 농사나 어업같은 1차 산업도 예전에는 큰 변화가 없이 안정되어 있었으나, 요즈음은 여러 가지 불확실한 요인이 많이 생겨, 크게 풍작을 거두기도 하고 흉년을 맞이하기도 한다. 다행인 것은 이번 관세협상에서 농산물, 특히 쌀과 쇠고기는 피해갈 수 있었다고 한다. 우리는 하루를 마치면서 밤에 침대에 앉아 망하지 않은 것을 감사해야 하고, 아침에 집을 나서면서 별일 없기를 간절히 빌어야 하는 불안한 시대를 살고 있다.

상황이 이렇게 불확실한 까닭에, 반대심리로 현대인들은 어느때보다 확실하고 든든한 것을 원하고 있다. 흔들리고 있는 것들 가운데 어떤 강하고 확실한 것은 없을까, 사람들은 갈망하는 듯하다. 청소년들이 강력한 리듬과 가사의 노래를 부르는 가수들에 열광한다. 얼마 전에 속초에 싸이가 열광적인 흠뻑쑈를 하는데 사람들이 엄청나게 몰렸다고 한다. 일확천금을 약속하는 사업에 사람들이 많이 빠지기도 하고, 자기만이 하늘의 계시를 받은 듯이 허풍을 떠는 이단 사이비에 사람들이 몰리는 것도 다 이런 심리에서 비롯된 것이다.

믿음에 있어서도 전세계적으로 공통되는 것이 하나 있는데, 확실한 믿음의 내용을 분명하게 강조하는 보수주의가 부흥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 정통이란 이름으로 강경보수로 흐르는 경향이 많다. 미국에 남침례교회, 남미와 아프리카 지역에는 오순절성령운동 교단, 동유럽에는 오랜 전통과 강력한 교권을 제시하는 가톨릭교회가 강하다. 과거에도 보수주의와 진보주의는 기독교 안에 있었지만, 요즈음처럼 보수주의 중에서도 골통(?) 보수인 근본주의라고 하는 극우보수가 기독교에서 주류가 되었던 때는 없었다.

사회의 급격하고 다양한 변화와 교회의 보수적인 확실성은 정말 안 맞는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정통과 변화, 믿음과 의심, 이 둘 사이에 어중간하게 끼어있다. 교회에서는 의심없는 믿음을 말한다. 교회에서는 구원이 보장된 믿음의 확실한 길을 설교한다. 그러나 문만 열고 나가면 사람들은 세상 속에서 모든 것을 의심하며 하루하루 흔들리며 살아가고 있다. 이 의심과 확신 사이에서 고민하며 씨름하는 가운데 우리 믿음이 있다.

 

교회와 교인의 현실

본문은 한 남자가 보여주는 믿음의 초라한 현실을 그려준다. 그 남자의 아들은 이상한 병에 걸려서 물에도 뛰어들고 불에도 뛰어든다. 아마 간질증세에 정신질환까지 겹쳐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귀신이 주관하고 있다(20). 얼마나 하루하루가 힘들었을까! 이 아이가 병으로 오랫동안 고생을 하니 온 집안이 말이 아니었다. 그 아이의 아버지인 남자는 예수님께 와서 이렇게 말한다.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도와주옵소서.”(22) 매우 불확실한 얘기이다. 그러자 예수님은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하신다. 그때 이 남자는 소리를 지르며 말한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23-24).

본문에서 결국 예수님의 능력으로 이 소년이 고침받았다. 예수님의 치유 기적 중의 한 사건이다! 이 기적과 능력의 현장에 초라한 한 남자가 있다. 그는 할 수 있을까 의심한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자기가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기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달라고 한다. 이 남자도 의심과 믿음 사이에서 어중간한 자리에 서 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여기에 나타나 있다. 세속적인 생활에서,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의심하게 된다. 물질적인 세계관, 세속적인 생활방식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러나 복음이 선포되는 거룩한 자리, 교회로 오면 구원받은 사람이요 거듭난 자다. 이 중간 단계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살아간다. 무슨 일이 터지면, “내가 믿나이다!” 하는데, 항상 하실 수 있으면하고 조건이 붙는다. 그리고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동시에 고백하는 것이다.

예수 믿으면 구원 받는다. 예수 믿는 자에게 축복이 임한다. 그러나 문제는 연약한 우리의 생각에 구원과 축복은 현실적으로 모호하게 나타날 때가 너무 많다. 교회는 쉽게 구원의 공식을 주지만, 현실에서 그 공식대로 안 통할 때가 많다. 교회에는 구원을 이미 완성한 성자들만 모여있지 않다. 오히려 교회에는 구원의 길이 확실한데도 늘 우리 현실에서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고민하고 기도하는 구도자들이 모여있다. 그들은 늘 회개하면서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나 길을 찾아간다. 교회의 가장 큰 특징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는 곳이라는 점이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여기에 교회와 우리의 현주소가 있다. 어쩌면 이 불쌍한 아이의 아버지와 같이, 신앙과 불신앙의 공존! 여기에 교회와 우리 현대 교인들의 현주소가 있다.

예수 믿어 병고침을 받고,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은혜충만한 생활을 함으로 한 점 의심의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을 뿐 아니라, 예수 믿은 후 뚜렷한 변화의 증거가 있고, 확실하게 간증할 수 있는 축복이 있다면 의심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대다수의 교인들은 그런 경험을 할 기회를 많이 가지지 못했고, 그런 체험과 확신이 있었어도 살다보면 늘 흐려지고 흔들리곤 한다.

루터교회의 유명한 신학자요 저술가인 마틴 마티(Martin Marty) 목사는 목사들의 목사라는 얘기를 들을 정도로 존경받는 목사님인데, 이런 말을 했단다. “가까운 사람에게 자랑스럽게 말할 정도로 하나님과 직접적인 만남을 가진 경우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 하지만 대중 앞에서 공개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경우는 단 한 번도 없다하였다. 이것은 그분이 유난히 은혜가 부족하거나 믿음이 약해서가 아니라, 의심의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이 살아가는 믿음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예이다.

목회를 하면서 리젠트대학에서 가르쳤던 유진 피터슨(Eugine Peterson) 박사는 매년 청소년들의 수련회나 집회에 참여했었는데- 우리나라 같으면 CCC나 예수전도단 수련회와 같은 곳이다- 집회의 충만함과 일상생활 사이에 연속성이 없다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이게 무슨 말인가? 부흥집회나 수련회 같은 데서 성령 받았다, 예수님 만났다, 구원의 확신을 얻었다 하는데, 현실 속에 오면 그런 확신이 생활 속에서 그대로 나타나지 못하더라는 거다. 여전히 예수님이 그 중심에 오신 생활을 하게 되지 않더라는 것. 여기에 우리 고민이 있다.

원주에 살 때, 외곽지역 넘어가는 길 옆에 교회 건물에 붙어있는 플래카드에 이렇게 적혀있었다. ‘예수가 답이다.’ 그러나, 늘 우리에게 예수가 답인가? 그렇게 되고 싶지만, 현실은 예수가 오히려 물음일 경우도 많다. 모태신앙으로 평생을 살아가는 자녀들이 예수님에 대해, 예수를 따라가는 삶에 대해 얼마나 많은 물음과 고민을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말하자면,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훨씬 더 많은 경우에 예수가 물음이요 과제이다. 우리 믿음은 물음과 대답 사이에, 의심과 확신 사이에 놓여있다.

 

믿음, 순례의 길

욥은 동방의 의인이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믿음의 사람이다. 그러나 욥기를 보면, 모든 것을 빼앗기고 땡볕에서 자기 몸을 긁고 있는 욥은 얼마나 고민하고 믿음이 흔들리고 있는가! 사실 욥기에서 보여주려고 하는 욥의 참 모습은 동방의 한 의인이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는데도 의연하게 흔들리지 않고 믿음을 지키는 모습이 아니다. 오히려 욥기는 실패, 가난, 상실 때문에 고민하고 흔들리는 가운데 하나님을 찾아가는 욥의 여정을 보여주고 있다. 믿음이 없어서가 아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욥은 이해할 수 없는 모순의 현실 앞에서 그 현실을 끌어안고 고민하며 의심하고 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는가? 하나님은 존재하는가? 그런데 왜 이런 일들이 생긴단 말인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불신의 삶 한 가운데에서 욥처럼 고민하며 믿음을 지키려고 애쓰는가!

욥기에 나오는 믿음 좋은 얘기는 거의 친구들 얘기다.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22:21) 욥을 꾸짖으면서 엘리바스라는 친구가 하는 말이다. “네가 만일 하나님을 부지런히 구하고 전능하신 이에게 빌고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정녕 너를 돌아보시고 네 의로운 집으로 형통하게 하실 것이라.”(8:5-6) 이 말은 빌닷이 욥을 충고하는 말이다. 반면에 욥은 원망한다, 조급해한다, 답답해하고 두려워한다, 낙심하고 잠 못 이룬다(21:4-7 ).

하나님은 결국 욥에게 대답을 주셨지만, 거기까지 가는 동안 욥은 계속 고민하고 씨름하고 물어야 했다. 전도서와 시편을 보면 신앙인의 의심이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거룩한 책에 의심과 회의가 주제가 되다니! 그러나, 성서를 통해서 우리가 알게 되는 또 하나의 사실은 성서는 확신을 주는 책이기도 하지만, 의심과 고민을 끌어안고 있는 책이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위대한 신앙인은 솔직하게 의심한 사람이다. 영적 고민을 회피하지 않고 깊은 심성으로 대결해 나간 사람들이 대부분 위대한 신앙인의 반열에 서 있다.

열두 제자 중 도마는 의심 많은 제자로 이름이 나 있다. 그런데, 도마에게 별로 알려지지 않은 점이 있는데, 예수님 부활하신 후에 제일 먼저 정확하게 신앙을 고백한 사람이 도마라는 사실이다!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는 이 요약된 신앙고백은 초대교회 신앙고백의 중심을 이루었다. 또 도마가 가장 먼 곳, 인도까지 선교사로 간 사람이었다. 도마가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을 보아야 믿겠다고 정직하게 고민한 것은 의심을 통과하여 진정한 믿음으로 나아가는 과정이었다. 따라서 그는 누구보다 먼저 부활하신 주님 앞에서 신앙고백할 수 있었고, 땅끝까지 복음 전하러 나갈 수 있었다.

어거스틴은 고백록이라는 자기 신앙고백의 기록을 남겨서 인류에게 진리의 길을 밝혀주었는데, 그 책에서 어거스틴은 그가 얼마나 주님을 떠나 먼길로 방황했는가를 기록한다. 그런데 세속의 물결 속에서 방황할 때나, 회의주의에 빠져 이단으로 갈 때에도 결국 어거스틴은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기 위한 깊은 노력을 하고 있었다.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정직한 의심, 솔직한 반항은 진실한 믿음으로 가기 위한 구도의 길이었다. 루터는 일주일 이상 완전히 하나님을 떠나 있었던 적도 있었다고 고백을 한다. 거의 매주 설교를 하고 신학생들을 가르쳤던 성인도 이런 의심 속에서 자기 믿음과 삶을 돌아볼 때가 있었다.

보이는 감각에 매여사는 사람과 보이지 않는 하나님 사이의 관계에는 의심이라는 요소가 내포될 수밖에 없다!” 기독교 저술가 필립 얀시(Philip Yancey)의 말이다. 문제는, 의심에서 불신으로 떨어져버리느냐, 의심에서 확신으로 가느냐-의 차이이다. 선하신 하나님이 왜 죄없는 자기를 이렇게 고통에 빠뜨리느냐 하는 어려운 현실 앞에서 정직하게 씨름하면서 욥은 믿음으로 나아갔다. 그럴 때 욥은 훨씬 겸손해져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유한한 피조물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신비와 위대하심을 훨씬 생생하게 알 수 있었다.

쉽게 확신할 수 없지만 조금만 마음을 기울여보면 하나님의 증거가 많이 있다. 세례 요한도 사람들을 보내어 예수가 누구인지 물어보게 했다. 이런 경우에 의심은 믿음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베뢰아 사람도 신사적이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에 이 말씀이 그러한가 하여 성경을 상고했다 했다. 말하자면 의심하면서 고민하면서 성경을 읽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신비, 무한한 가능성은 쉽게 확신할 수 없다. 그것은 씹으면 씹을수록 새 맛이 나오는 칡뿌리와 같다. 무어라 쉽게 파악할 수 없지만 무궁무진하고 크시다.

우리는 보통 교회에서 이런 말을 많이 들으며 자랐다. ‘의심하지 말아라. 그냥 믿어라.’ ‘무조건 아멘하면 복을 주신다.’ 이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맨 나중에 해야 할 말이다. 제발 하나님 앞에, 진리 앞에 조금은 정직하라! 많은 물음과 더불어 오랜 씨름을 하고, 많은 길을 달려간 후에 확신에 이를 때가 있을 것이다. 영적 순례를 하지 않고 애초부터 달랑 모범 답안부터 찾는 것은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이다. 하루아침에 구원을 받았다고 선선히 시인하는 것도 믿음이지만, 고민하며 오랫동안 찾아가는 것도 잘못은 아니다. 너무 쉽게 결정해버리면 종이호랑이처럼 무너질 때도 있다. 여기에 살이 붙고 피가 돌아 진짜 산 호랑이가 되려면, 현실 속에서 많은 의심과 싸우며 긴 순례의 여정을 걸어가야 한다.

 

의심을 통과하여 확신으로!

교양인들의 불신앙이 요즘 세상의 추세이다. 건전한 상식을 가진 이들이 교회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기를 꺼린다. 그들은 이해하고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강요되는 확신을 싫어한다. 교회는 섣불리 그들을 울타리 밖으로 쫓아버렸다. 교회와 신앙에 대하여 많은 얘기를 하고 싶어 하며, 생각보다 진지하고 성경에 대하여도 깊은 내용까지 알고 있는데, 그들이 의문스러워하고 번민할 때 교회가 함께 대화해주지 못했다는 점이다. 교양과 상식을 가진 그런 사람들이 교회 밖으로 나가 세상의 광야로 가버릴 때 그 문제를 함께 해주는 교인 친구가 없다. 21세기 교회는 의심의 문화 속에서 방황하는 사람들과 함께 길을 갈 작정을 해야 한다. 그래야 의심의 문화 가운데 진실한 구도자들을 많이 구원해 낼 수 있다.

대학 시절에 들은 얘기다. 대학교 1학년은 자기가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겁도 없이 아는 척을 하고 허세를 부린다. 대학교 2학년은 자기가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조금 겸손해지고 알아보려고 애를 쓴다. 대학교 3학년은 자기가 안다는 것을 모른다. 그래서 계속 애를 쓰면서도 책임있게 나서서 말하지 않는다. 대학교 4학년은 자기가 안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이제 책임있는 사회인으로 자기 목소리를 낸다. 저는 신앙에도 1학년에서 4학년까지 있다고 본다. 대부분의 우리들은 1학년에서 3학년 사이에 있다. 굉장히 이룬 줄로 아는 사람들, 확신을 얻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신앙초보자인 1학년일 경우가 많다. 교회 안에 있는 회의주의자들, 고민하고 방황하지만 참된 믿음의 길이 무엇인지 찾아가는 사람들이 1학년보다 상급반인 2학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의심하는 사람은 거기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3학년으로 진급을 해야 한다.

의심과 확신 사이에서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고민하고 있다. 그러나 이 고민, 이 의심은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것으로서, 주님의 얼굴빛 가운데 아침 안개와 같이 사라질 때가 올 것이다. <의심을 통과하여 믿음으로!> 그때까지는 정직하게 고민하고 정직하게 씨름하라! 기적이 나타나지 않고 계시의 빛이 손에 잡히듯 확실하지 않더라도 겸손하고 정직하게 영적 순례를 계속할 때 주님은 우리들의 그와 같은 미완성의 믿음을 내치지 않고 오히려 귀하게 여기시며 격려하실지도 모른다.

교회는 기도하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다. 아주 흐린 불빛만 있으므로.” 죤 던(John Donne)이라는 사람이 한 말이다. 신비한 공간을 남겨둔 교회, 우리의 한계를 겸손히 인정하면서 더욱 주님을 필요로 하는 교회, 이런 교회가 예배하기에 적합한 교회가 아닐까? 흔들리는 시대에서 모든 흔들리는 것들 가운데 우리 믿음마저 흔들리지만, 흔들리는 대로 주의 이름을 부르며 나아가면, 주님은 진리와 공의로 가르치셔서 결국에는 우리 죄인들까지도 그 나라의 영광에 이르게 하실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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